강감찬은 본관이 금주(衿州)이고, 초명은 은천(殷川)이다. 경주에서 금주로 이주해 호족으로 성장한 강여청(姜餘淸)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강궁진(姜弓 珍)으로 태조 왕건을 섬겨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하고 지략이 많았으며, 983년(성종 3) 과거 갑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예부시랑(禮部侍郎)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聖宗)이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내세워 서경(西京)을 침공하자 일 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현종(顯宗)을 나주(羅州)로 피난 시켜 사직 을 보호케 하였다. 이듬해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고, 한림학사(翰林學士)· 승지(承旨)·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吏部 尙書) 등을 지냈다.
그 해에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였다. 강감찬 은 서북면 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총사령관격인 상원수대장군(上 元帥大將軍)이 되어 부원수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거란군을 격파하였다.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고려의 20만 대군은 안주(安州)에서 대기하다가 적 의 접근을 기다려 흥화진(興化鎭:현재 평안북도 의주군 위원면)으로 나아갔 다. 그리고 정예기병 1만 2,000천명을 산기슭에 잠복·배치한 뒤 큰 새끼줄 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아두었다가 때를 맞추어 물을 일시에 내려 보내 큰 전과를 거두었다.
전투에서 패전한 거란군은 곧바로 개경(開京)을 침공하려 했으나, 자주(慈 州:현재 평안남도 자산)와 신은현(新恩縣:현재 황해도 신계)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였다. 이듬해 정월 강감찬은 거란군이 개경 근방까지 진격해 오자 병마판관 김종현에게 개경을 수비하게 하였고, 거란군이 군사를 돌려 금천강씨 선조 유적사진보 / 131 연주와 위주 쪽으로 진격하자 기습하여 5백 명이 넘게 목 베었다.
특히 귀주(龜州)에서는 비바람이 거란군 쪽으로 바뀐 상황을 이용하여 전력 을 다해 공격하여 전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혔다. 거란군은 애초 10만의 병력 가운데 고작 수천에 불과한 인원들만 살아 돌아갔다고 한다. 이때의 귀주대첩(龜州大捷)은 대외항전사상 중요한 전투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이때의 전공으로 현종은 친히 영파역(迎坡驛)까지 마중을 나와 강감찬을 극 진히 환영하였다. 강감찬으로 인해 거란은 침략야욕을 버리게 되었고 고려와 는 평화적 국교가 성립되었다. 또한 그는 개경에 나성(羅城)을 쌓는 것을 주 장해 국방을 더욱 튼튼히 하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다. 전란이 수습된 뒤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 삼백호(檢校太尉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食邑三百戶)에 봉해 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謨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1020년에는 특 진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 식읍오백호(特進檢校太傅天水縣開國子食邑五百 戶)에 봉해진 뒤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030년(현종 21)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 고, 이듬해 덕종(德宗)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현개국후 식읍일천호(開府儀同三司推忠協謨安國奉上功 臣特進檢校太師侍中天水縣開國侯食邑一千戶)에 봉해졌다.
현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고 문종(文宗) 때에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 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