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천강씨의유래

금천강성(衿川姜姓)의 시조는 신라 집사성 시랑(執事省 侍郞)을 지낸 강여 청(姜餘淸)이다. 강여청은 신라 때부터 금주(금천의 옛 지명)로 이사하여 살 았다.
그 후손인 강궁진(姜弓珍)이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한 공으로 고려 태조 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여후(呂侯)에 피봉(皮封)되었다.
이때 관향(貫鄕)을 하사(下賜)받아 금천강성이 되었다.

후손들은 관향조(貫鄕祖) 궁진(弓珍)의 고조(高祖)인 여청(餘淸)을 시조(始 祖)로 모시고 있다.
원래의 관향은 금주(衿州)였으나, 금주현(衿州縣)이 금천현(衿川縣)으로 변 경되면서 관향도 금천(衿川)으로 바뀌었다. 금천현은 이후 행정구역상 시흥 군을 거쳐 현재는 서울시 관악구로 지칭되고 있다.

인헌공(仁憲公) 강감찬(姜邯贊)은 관향조 강궁진의 아들이고 아명(兒名)은 은천(殷川), 호(號)는 울정(蔚亭)이며, 고려 귀주대첩을 대승으로 이끈 문관 이면서 명장으로 알려진 강감찬장군이다.
인헌공 강감찬을 문곡성의 화신이라 했으며, 체구는 작고, 검소하여 남루한 차림에 관원들이 없이 여길 때면 지혜를 발휘하여 관원들을 휘어잡았으며, 개구리 울음 소리를 멈추게 한 것을 비롯한 수많은 설화가 지금까지도 전해 지고 있다.
인헌공 강감찬은 옛 지명 금주로 현재 행정구역상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낙 성대에서 태어났다. 매년 가을이면 낙성대에서 관악구 주체로 인헌대제를 지 내고 있다. 그 곳 봉천동에는 강감찬장군의 시호 인헌을 딴 교명(校名) 및 지 명을 쓰는 초·중·고등학교가 있다. 12세손 한성윤(漢城尹) 강양(姜揚)에 이르러 독자로 대를 이어 오다가 비 호(匪虎), 비웅(匪熊), 비용(匪龍), 비이(匪彲), 4형제를 둠으로써 비로소 갑, 을, 병, 정의 분파를 이루게 되었으나, 조선조 16대왕 인조와 왕세자 소현의 갈등으로 소현세자가 서거하자 19세손 우의정 문정공(文貞公) 강석기(姜碩 期)의 따님이신 소현세자빈이 강빈옥사(김자점과 조소용의 모함에 의한 소현 세자빈(민회빈<강빈>)의 옥사)로 사사 당하면서 금천강문(衿川姜門)은 멸문 지화를 당했다.

이후 100여년이 지난 조선조 19대왕 숙종조에 이르러 22세손 강봉서(姜 鳳瑞)의 용기와 기백으로 격쟁(신문고)을 울림으로써 사면복권 복작되어 소 현세자빈 강씨를 민회빈으로,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의 묘소는 민회묘에서 26대왕 고종조에 와서는 영회원으로 승격됐으나 1970년대에 정부예산문제 로 재실 및 부대시설을 철거했는데, 근래에 다시 복원 계획이 검토되고 있다. 강빈옥사 당시 가문의 멸문지화로 사사 또는 은신하면서 본관을 숨기거나 전환해 살아온 사람들이 많고, 또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북의 왕래가 끊기 면서 남한의 문중원들만의 숫자가 통계(통계청 자료:현재 7백여 가구 2000 여명)에 잡혀 소수문중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